Ⅰ.서론
알코올 중독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알코올 중독의 가장 해로운 결과가 자녀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이라고 할 만큼, 자녀에 대한 영향은 절대적이고 파괴적이다. 부모의 알코올 중독은 자녀에게 불안정과 혼란을 야기하며, 다양한 정신적․신체적 위험요인을 제공한 다[25]. 이들은 부모의 싸움과 학대, 예측 불가능한 훈육, 버려짐의 위협, 부모 자녀의 역할 전도, 자녀 의 정서적 욕구에 대한 거부 등을 경험하고, 적대감과 갈등, 애착 형성의 어려움 속에 성장한다[3]. 결 과적으로 이들은 다양한 개인내적․대인관계적 문제를 갖게 되어 사회적․정서적 고립, 우울, 불안, 낮 은 자존감, 관계에서의 문제, 적응의 어려움, 부정적 자기 평가, 충동적 행동, 직업 적응상의 어려움 등 의 부정적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2, 4, 9, 11, 16, 25, 26].
알코올 중독의 부정적 결과 중 하나는 대를 잇는 중독의 세대전이 현상이다. 부모의 알코올 중독은자녀의 알코올 중독을 예측하는 분명한 위험요인으로[6], 알코올중독자 자녀는 일반가정자녀에 비해 알코올 중독자가 될 가능성이 4~5배 정도 높다[12]. 이는 어린 시절 부모의 알코올 중독을 경험한 이들 이 성인이 되어 자신의 중독으로 고통 받고, 또한 이를 다시 자녀에게 대물림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독의 세대전이 현상은 단순히 유전적 영향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유전적 특질은 세대전이 현상의 단지 40%에서 60% 정도만을 설명한다고 알려져 있다[24]. 선행 연구들은 유전적 영향 이외 에 역기능적 가족 상호작용 등의 다양한 환경적 요인이 알코올 중독의 세대전이에 기여하고 있음을 보 여준다[12]. 이는 이러한 환경적 요인의 이해와 통제를 통해 중독의 세대전이 예방이 가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알코올 중독 가정에서 성장하여 알코올 중독을 경험한 회복자의 양육 환경과 중독 과 정에 대한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이해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알코올 중독 가정 자녀들이 경험하는 부정 적 영향력에 대한 단편적 이해가 아닌, 부모의 중독과 맞물려 형성되는 환경과 이러한 환경이 이후 이 들의 중독의 진행 과정에서 어떻게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를 깊이 있게 탐색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나아가 이들의 회복 경험을 이해함으로써 중독과 회복의 경계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다.
기존 국내연구는 알코올 중독 세대전이의 높은 가능성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18, 28, 30],중독의 세대전이 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이를 임상에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회복 의 경험과 과정이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해 알코올중독자 자녀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강화하고 이들의 회복 탄력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부모의 알코올 중독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하고, 자신 역시 알코올 중독을 경험하고 회복 중인 회복자의 생애경험에 대한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이해를 탐색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알코올 중독의 세대전이를 예방하고 알코올 중독 가정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의 욕구에 부합하는 실천 적, 정책적 제언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제기된 연구 질문은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 중인 알코올중독자 자녀의 생애 경험은 어떠한가?”이다.
Ⅱ.선행연구 고찰
알코올중독자 자녀는 가장 중요한 타자인 부모의 중독이라는 영향력 아래 성장기를 보내며, 이는 자녀들에게 광범위하고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음주는 부모의 갈등과 학대, 예측 불가능한 훈육, 버려짐의 위협, 부모 자녀의 역할 전도, 정서적 욕구에 대한 거부[3] 등 자녀들에게 부정적인 아동기 경 험의 위험을 높인다[25]. 또한 가족응집력의 부족과 낮은 애착의 질, 부모의 폭력행사와 부적절한 부모 역할을 경험한다[7].
성장 과정에서의 부정적 경험은 다양한 문제로 연결된다. 알코올중독자 자녀들은 높은 불안과 우울[14, 18, 28], 부정적 자기평가와 낮은 자존감[26], 공격적 행동[8]의 특성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행동 조절과 관련된 고차원 처리에서의 어려움[23]을 보이며, 산만함과 주의집중 부족[28]이 나타나기도 한 다. 학업 스트레스와 학교생활 적응에서의 어려움을 경험하며[14], 이성 관계에서의 불안과 회피[22], 더 낮은 결혼생활의 질과 안정성[27] 등 친밀한 관계에서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알코올중독자 자녀에 대한 부정적 영향력은 성장기 뿐 아니라 성인기까지 이어진다. 성인기까지 지속된 부정적 영향력이 집약된 문제가 바로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알코올 중독이다. 부모의 알코올 중독 은 자녀가 성인기 알코올 중독 예측에 있어 명백한 위험요인[6]으로, 그 위험성은 3-4배 정도 커진다고 알려져 있다[24]. 국내 연구에서도 알코올 중독자 자녀의 폭음자 비율이 유의미하게 높았고, 문제 음주 에 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서적 불안정성 역시 높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29]. 또 다른 연 구[18]에서도 알코올중독자 자녀의 알코올 중독 위험성이 유의미하게 높았고, 더 높은 불안과 우울 소 견을 보이고 있어 중독의 세대전이가 발생할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알코올중독자 자녀 는 중독으로 진행된 이후 그 심각성, 정신적 증상, 신체화 증상, 가족관계내의 긴장이나 학대 경험이 유 의미하게 높아[29] 세대간 전이된 중독은 그 양상이 더욱 심각하게 전개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세대전이는 알코올 중독의 유전적 위험성 뿐 아니라 부모로 인한 환경적 요인이 다양하게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쌍생아 연구나 입양 연구를 통해 알코올 중독 세대전이의 유전적 위험성이 확인 된 것은 사실이나, 유전적인 특질로 그 위험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정도는 40%에서 60%에 지나지 않 는다[24]. 즉 중독의 세대전이 현상은 단순한 유전적 요인이 아닌 환경적 요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바라보아야 보다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알코올 중독의 세대전이에 있어 유전적 요소보다는 역기 능적 가족 상호작용 등의 환경적 요인이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12]나, 약물 남용에 대 한 유전적 위험성이 환경적 통제에 의해 상당히 완화된다는 쌍생아 대상의 연구 결과[21] 역시 이러 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알코올중독자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인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와 적절한 개입을 통해 알코올 중독의 세대전이가 예방될 수 있음을 반증한다. 부모의 사회적 지지, 일관성 있는 부모의 훈육 등이 자녀가 술이나 약물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보호 요인 으로 작용하고 있다[17, 20]는 연구 결과 역시 알코올중독자 자녀들의 환경적 요인에 보다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연구는 부모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자녀들의 부정적 경험과 영향력, 높은 알코올 중독 위험성에 대한 확인에 그치고 있다. 또한 중독의 세대전이에 있어서의 환경적 영향력의 중요 성과 이해의 필요성이 제기될 뿐 이에 대한 심층적이고 폭넓은 이해를 도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뿐 만 아니라 이후의 회복 과정에 대한 연구가 없어 알코올 중독의 세대전이라는 부정적 편견만을 확인하 고 회복의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에 이들이 주관적으로 경험한 성장 환경과 중독 과정, 그리고 나 아가 회복의 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들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중독을 예방하고 회복을 지원하기 위한 논의의 기초 자료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Ⅲ.연구방법
1.현상학
본 연구는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로서 자신 역시 알코올 중독을 경험하고 현재 회복 중인 회복자들이부모의 알코올 중독과 맞물려 형성되는 성장 환경과 중독 그리고 회복의 과정에서 주관적으로 경험하 는 생애 경험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복잡한 인간 경험으로서의 생애 경험을 풍부하고 상황적이며 세부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현상학적 질적 연구를 시도 하였다. 인간의 경험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탐구[19]하며, 개인의 경험의 실제가 아닌 경험을 ‘어떻게 지각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추는[9] 현상학적 질적 연구는 연구참여자 자신의 고유하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경험의 의미 와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부모의 알코올 중독이라는 동일한 환경 내에서도 각 가족 구성원의 주관적 경험은 독특성을 가진 개별적 경험이며, 이러한 경험이 이후 중독과 회복의 과정과 상호 연관되는 복 합적이고 역동적인 현상이다. 이는 인간 경험의 복잡성에 대한 전제를 통해 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 고자 하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포괄적이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2.연구 참여자
본 연구에는 부모 중 한명 이상이 알코올 중독이었으며, 자신 역시 알코올 중독을 경험하고 현재 회복중인 남녀 8명이 참여하였다. 연구참여자 선정의 구체적인 기준은 첫째,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알코 올 중독이었고, 둘째, 자신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병원 치료나 상담 센터 이용, 자조 모임 참여의 경 험이 있으며, 셋째, 현재 단주 중으로 6개월 이상의 회복 기간을 가진 자로 하였다. 회복 중인 자로 연구참여자의 기준을 정한 이유는 회복이 어느 정도 경과한 경우 자신의 생애 경험에 대한 보다 정확하 고 풍부한 진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독과 대비되는 회복의 경험을 통해 중독의 세대전이 과 정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 자조모임인 AA와 중독 관련 상담센터, 전 문 의료기관을 통해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연구참여자를 소개 받고 이들에게 다시 소개를 받는 형식으 로 ‘의도적 표집’을 통해 연구참여자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졌다. 우선 기관의 실무자를 통해 연구의 목 적과 방식에 대하여 소개하고 이에 대한 동의를 얻었고, 이후 연구자가 직접 유선을 통해 다시 한번 연 구 동의를 받은 후에 연구가 진행되었다. 연구참여자들의 특성은 <Table 1>과 같다.
3.자료수집과 분석
본 연구의 자료수집은 2014년 11월부터 2015년 3월까지 5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심층면담을 통한자료수집이 주로 이루어졌고, 그 외에 연구참여자가 직접 작성한 글, 전화 통화 등을 통해 자료가 보완 되었다. 심층면담은 연구참여자별로 각 2~3회 이루어졌으며, 1회당 평균 90분에서 120분 사이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면담의 일정과 장소는 연구참여자의 상황에 따라 결정하였고, 연구참여자가 원하는 장소 로 이동하여 근처 카페나 세미나 룸, 또는 연구참여자가 거주하고 있는 기관의 상담실 등에서 면담이 진행되었다. 면담의 전 과정은 녹음되었고, 이를 그대로 기술하여 자료화하였다. 면담 과정에서의 연구 참여자의 표정이나 행동, 의미 있는 침묵 등도 기록하여 자료의 생생함을 살리고자 하였다. 면담 과정 에서 연구참여자의 감정이나 태도, 연구자의 느낌 등 연구와 관련되는 부분을 기록한 현장 노트를 자 료로 활용하였다.
4.연구의 질 검증과 윤리적 고려
연구의 질을 검증하기 위하여 자료의 다각화를 시도하였다. 심층면담 자료 이외에 전화 면담과 연구참여자의 수기, 연구자의 현장 노트를 활용하였다. 또한 연구 결과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동료 보고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중독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이 있는 관련 전문가 2인과 함께 연구 절 차와 결과를 함께 점검하였다. 연구참여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연구 목적과 방법에 대한 직접적 설명 후 본인의 자발적 선택에 따라 참여하였다. 또한 참여 동기를 밝힌 연구 참여자와의 첫 면담에서 연구 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재차 설명하고 문서화된 동의를 받았다. 면담 내용은 녹음되며, 자료는 연구자 와 녹취에 참여하는 1인에게만 개방될 것임을 설명하였다. 연구 진행 과정에서 질문이나 답변을 거부 할 수 있으며, 원하는 경우 언제든 연구 참여를 중지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또한 연구 참여에 대한 사례를 상품권으로 제공하였다.
Ⅳ.연구결과
1.생애 경험의 구성 요소
연구참여자들의 삶의 경험은 1) 이상한 나라에서의 어린 시절, 2) 중독으로 이어진 길, 3) 중독이라는지하세계 모험, 4) 단주를 통한 일상으로의 귀환이라는 주제로 범주화되었다. 이는 <Table 2>와 같이 정리되었다.
1)고단하고 무섭고 외로웠던 아이
비일상성(非日常性)이 지배하는 세계
연구참여자들이 기억하는 유년기의 집은 편안한 안식처가 아닌 열등감과 소외감, 또는 서러움의 공간이다. 또한 함께 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인 갈등과 다툼의 시간이었다. 특히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 인지 혼란스러울 만큼 때로는 중독자에 의해, 때로는 중독이 아닌 부모에 의해,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은 집을 두려움의 공간으로 각인시킨다. 이 안에서 이들은 위태로운 일상을 보낸다.
그러니 집안이 항상 싸움이었고, 어머니하고. 또 어머니하고 싸우다 보면 할머니는 아버님 편들죠.그렇게 해서 꼭 이렇게 세 분이 싸우셨던, 다툰 일이 많았던 그런 기억이 있고. (G)
형한테 상당히 많이 맞고 지냈지. (F)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혹시 별 일 없이 잘 지나갈 수 있을까? (A)
연구참여자들이 가족 내에서 경험하는 비일상적 상황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경험이다. 이들에게는비일상적 사건들이 일상적 상황으로 경험되고 삶의 한 부분으로 익숙해진다. 정상이 정상이 아닌, 비정 상이 오히려 정상으로 느껴지는 왜곡된 일상이다.
항상 취해서 이렇게 쓰러져 병원에도 많이 실려 가시고. 솔직히 막 처음에는 엄마 막 잘못 되는거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한 두세 번 병원에 실려 가고 나니까 좀 무뎌진다 그러나? 또 저러 다 말겠지. 약간 그런 생각. (D)
연구참여자들에게 부모의 물리적 혹은 심리적 부재는 일상이다. 또한 이들에게 부모란 왜곡된 양육방식과 인정받지 못한 권위를 가진 존재이다. 이들은 부모라는 역할모델을 통해 건강한 삶의 방식과 규범을 습득하는데 실패하고 이는 이후 부적응의 기반이 된다.
저희 아버님은 살아 계실 때도 역할이 없으셨어요. 그냥 그림자처럼 이렇게 워낙 어머니가 남편의역할 같은 것들을 다하셨고 아버지 역할까지도. (H)
지금 와 생각하면 부모 사랑은 다 똑같은 거 같은데 자녀를 가르치는 방법을 모르셨던 거 같아요.저희 아버지가 계모 밑에서 자랐어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맞고 자랐기 때문에 잘못하면 맞아야 되고 애들은 때려야 된다예요. (E)
차라리 맨 정신에서 저를 두들겨 팼으면 못나갔었을 거예요. 근데 그게 아니고 술 취한. 그러니까제가 보기에도 약간 말이 안 들어오는거죠. 엄마 말이 말 같지 않은 말? 차라리 엄마가 맨 정신에 정말 내가 따끔하게 정신 차릴 수 있도록 딱 잡아 줬으면 좋았을텐데. (D)
내 삶으로부터의 소외
연구참여자들은 성장 과정에서 일반적인 가정의 자녀들이라면 경험하고 누려야 하는 많은 것들을박탈당한 채 성장한다. 이들은 출생부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고, 환영받지 못한 자신에 대한 인식은 자기부정으로 이어진다.
저를 가지셔서 어쩔 수 없이 살게 되신다는 얘길 들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저는 저의 존재가 너무 싫은거예요. ‘나만 아니었으면 엄마가 괜찮았을 건데’라는 생각. 어릴 땐 그런 생각밖엔 안 들더 라구요. 그래서 죽고 싶다는 생각 되게 많이 했어요. (A)
연구참여자들은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시기에 오히려 부모를 돌보거나 이른 나이에 생계를 걱정하기도 한다. 부모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인식이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유년기의 일반적 경험이나 성장을 위한 활동으로부터 이들을 소외시킨다. 또한 자신의 삶이나 미래에 대한 스스 로의 진지한 고민과 선택을 박탈당한 채 가족이 원하는 삶, 상황에 의해 강요당한 역할을 위해 애쓰며 살게 된다.
(술을 마신) 아버지가 식사를 통 안하시니깐 내가 쌀 물을 갈아 드렸어요.(중략) 그 때가 초등학교한 3~4학년 때부터 그랬을 거예요. 아버지가 약국 하셨으니까. 이제 맨날 누워 계시니까 이제 맨날 가서 안마 하고, 손님이 오면 나가서. 그런데 제가 주사를 잘 놔요. 주사도 잘 놓고, 약 조제도 잘 해요. (B)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굉장히 고팠던 거 같애요.(H)
엄마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어떤 낙?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엄마 생각 하면서 공부를 많이했던 것 같아요 (A)
2)중독으로 이어진 길
뿌리 깊은 중독의 가족력
연구참여자들은 부모의 중독 이전에 이미 가족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중독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부터 중독을 인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중독과 회복 과정 속에 가족력으로 전해오는 중독을 인식 하는 경우도 있다.
외할아버지가 되게 알코올 중독자였고, 그 모습이 기억나는 것 같아요. 얼굴이 노래가지고 비쩍 말라가지구 항상 앉아 계셨던 거 같아요.(E)
(할아버지도) 듣기로는 굉장히 약주를 많이 드셨던 그런 분이었어요. 집에다 독을 이렇게 묻어놓고술을 드셨던 그런 분이셨고, 할머니는 역시도 자손이 없다보니까 그런 것으로 인해 술을, 막소주를 이렇게 대접으로 드셨던 분이예요 (G)
일상으로서의 술
연구참여자들은 일상적으로 중독과 술이 삶의 일부인 환경에서 성장한다. 이러한 환경은 연구참여자들이 술에 친숙해지고, 중독으로 접근해 가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술에 대한 적절한 규범의 부재 와 무지 속에 이들은 이른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술을 접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중독자인 부모 밑에 서 성장하며 겪는 부정적 경험과 모순되게 연구참여자들은 비합리적일 정도로 술을 일상의 한 부분으 로 받아들이는 아이러니를 겪게 된다.
술을 주신 게 아버님이셨어요. 그 때 학력고사 시험을 보러 가는데 아침에. 아버지가 술을 한잔 먹으면 긴장이 풀리니까 잘 본다고 나도 옛날에 그렇게 했다고. (H)
아주 어렸을 때 소주. 그 진로. 지금은 돌리는 거지만. 뚜껑 따는 거 거기다가 살짝 따라 갖구 그갓난 그 애기한테 이렇게 맛보라고 줬었대요. 제가, 애가 뭐 써가지고 뱉고 막 그랬었다고. (C)
아버님이 그 술 심부름 시킬 때 그 병 있잖아요. 큰 병. 그 병 술이거든요. 그거 조금씩 마시고 물담아서 갖다 드리고. (B)
가족 이외의 현실에서도 이들은 일상으로서의 술을 경험한다. 연구참여자들의 어린 시절에 술에 대한 올바른 규범을 보여줄 수 있는 어른은 가족 내에서도, 가족 밖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기술을 배우기 위해 따라다녔던) 오야지가 맨날 술만 먹고 와서 두들겨 패고. (B)
개들하고 어울리게 다니면서 거기서 같이 운동하고 하다보니까 자연적으로 술하고 담배는 접하게되더라고요. (F)
중2때 담임선생님이 워낙 술 좋아하신 분이었는데 술을 주시더라구요.(중략) 본인들 드시면서. 그당시에 술도 많이 주고 그랬어요.(H)
한 부모 밑 한 형제 앞에 놓인 서로 다른 길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형제자매라고 해서 모두 같은 생애과정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연구참여자들은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중독을 경험하지 않은 형제자매들에게서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곤 한 다. 그들은 가족의 문제에 몰입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가족이 아닌 외부에서의 건강한 관계 망을 갖고 자신의 삶을 유지해 나간다.
아버지하고 인제 싸울 때도 저는 그 감정이 제 감정인 마냥 휘둘려서 맨날 짜증나니까 술잔을 자꾸택했지만 걔(동생)는 이어폰 끼고 책을 읽고 있었고 거기에 그 감정은 그냥 그대로 분리하고 지 감 정 할 거 했던 거 같아요. 걔는 굉장히 냉철한 친구니까.(C)
나 같은 경우는 끊임없이 분리가 안 되기 때문에 걱정되고 그 속에 들어가서 제 삶을 못 찾는 거고,저희 언니는 자기 가족이 우선인거고. 근데 그게 건강한 것 같아요. (E)
(동생은) 주변에 굉장히 친구들을 잘 만난 거 같아요. (중략) 걔네들이 어울려서 인왕산에서 맨날 농구하고 건전한 스포츠를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걔네들을 풀었던거죠. (C)
연구참여자들과 중독이 아닌 형제자매들은 술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세계를 갖는다. 연구참여자들의경우 술이 일상적인 환경 안에서 술의 긍정적인 면을 경험하지만, 중독으로 가지 않은 형제자매들의 경우 술에 대한 부정적 경험이 긍정적 경험을 압도한다.
일단은 체질적으로 술이 안 받아야 될 거 같아요. 술이 받으면 나처럼 따라가는 쪽으로 많이 갈 것같아요. (중략) 근데 여동생은 나쁜 경험들이 우선 되고 여동생은 술이 안 받고 (H)
날카로운 첫 음주의 기억 그리고 탐닉
연구참여자들의 중독의 진행 과정에는 어느 순간의 결정적 관문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이전 세계와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는 첫 음주 경험을 통해 열린다. 회복 중인 현재 까지도 그 순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흥분되는, 전 생애를 통해 잊지 못할 짜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첫 경험은 이후의 지속적인 음주를 추구하게 되는 강력한 쾌감으로 작용한다.
한 잔 먹었는데 왜 이렇게 막 기분이 뱅뱅뱅뱅 도는데요. 미쳐버리겠더라고. 막 길을 걷는 건지 하늘을 나는 건지. 아~ 그 때 그 기분은요. 진짜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몰라요. 그렇게 기분이 좋 더라고. 와~~ 끝내 주더만. 지금 기억이 나네요. (B)
그 당시만 해도 마시면 제가 되게 빛나 보이는 그런 거 있었어요. 물론 착각이죠. 그런 느낌으로 마셨던 거 같아요. 또 다른 내 모습. 내성적이었는데 마시면 그 뭔가 사람들이 나를 다 좋아하는 거 같고. (A)
음주로 인한 긍정적 경험은 술이 다른 무엇보다 좋은, 술 외에는 좋은 게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술만을 찾게 되는 양상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술이 모든 것의 우선이 되고, 적극적으로 취함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남자친구들이 접근을 하면 걔네들은 남자친구 땜에 술을 먹었고, 나는 술 때문에 남자친구를 만났고.(E)
3)중독이라는 지하세계 모험
떡잎부터 달랐던 음주 양상
연구참여자들은 자신의 음주 양상이 처음부터 남들과는 달랐다고 회상한다. 초기부터 조절력의 상실이 나타났고, 술로 인해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제가 술을 마시면 필름도 되게 어렸을 때부터 끊겼었고, 그러니까 거의 마신 지 얼마 안되서부터그러구 한 번 마시면 멈출 수가 없어요. 그 기분 좋아진게 올라가면. 그래서 끊지를 못했어요. 마시 다가. 그러니까 보통 친구들은 마시다가 '아~ 나 힘들다'고 그러면서 근데 그런 게 없었어요.(D)
연구참여자들은 음주에 의한 부정적 결과들을 경험하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술로 인한 부정적 결과를 인정하면서도 술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맹신을 오래도록 유지한다. 술의 긍정적 경험을 선별 입력하고, 부정적 경험은 차단함은 물론, 술에 대한 미화로 나아가기도 한다.
술에 대한 기대, 효과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 술 먹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 풀린다. 실은 전체적으로 놓고서 보니까는 그 효과는 별로였거든요 근데 술 취한 상태라든지 술 먹기 직전이라든지 이 럴 때는 그게 확대 되어서 느껴져요.(H)
이러한 현실 부정의 근저에는 연구참여자들에게 절대적 기준이 되는 부모의 중독이 있다. 이미 중독이 더 심각하게 진행된 부모의 모습과 비교하여 자신은 양호하다고 결론짓는다.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인 절대적 비교 대상의 오류는 현 상황에 대한 직면을 방해한다.
그래도 나는 아빠처럼 누구를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때리는 것도 아니고 폭언을 하는 것도 아니고.내가 '난 다르다'란 생각을 하면서 부정하고 있는데. (A)
중독의 완성을 돕는 주변의 조력
첫 음주의 강렬한 경험 이후 연구참여자들은 음주를 지속하게 하는 다양한 환경적 조건의 상호작용속에 중독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해 간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은 가족이다. 이미 술과 중독이 일상적인 환경에서 함께 살아온 가족들은 이에 대한 왜곡된 정상(正常)의 기준을 공유하기에 연구참여자들이 초 기부터 보여주는 비정상적인 음주 행태에 대해 바른 인식과 대응을 하지 못한다.
외가댁 외삼촌들이 일곱 분인데 그 분들이 다 술을 좋아했거든요. 외가집도 만만치 않은 집안이예요. 술로 돌아가신 외삼촌이 세 분이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둔감했던 거 같애요. (G)
우리 집사람도 당연히 술을 안 먹으면 '왜 안 먹냐'고. 속이 아파서 안 먹는데 술을 먹어야 속이 풀린다고 학습이 되다 보니까 친정집에서는 그렇게 속을 풀었으니까. (H)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시도하는 순간에도 가족의 대응은 역기능적이다. 극단적 폭력이나무너진 권위에 기댄 가족의 개선 시도는 오히려 부정적 결과를 야기하며 역기능적 대처와 음주문제 악 화라는 악순환의 과정으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저희 엄마가 인제 공격하면서 '니 새끼 딸년 어저께 새벽2시에 완전 또라이가 돼서 들어오더라' 이렇게 일러요. 그러면 저희 아버지가 방에 있는 나를 술이 취했으니까 자겠죠? 아침까지. 또 깨워서 때리고. 그럼 저녁에 전 또 나가고. (E)
가족 이외의 환경 역시 이들의 중독을 조장한다. 음주 친화적인 주변 사람들 뿐 아니라 술 마시기에용이한 학교와 직장, 군대 환경이 있고 더 나아가 적절한 조언과 치료를 주지 못하는 전문가 역시 이들의 중독 진행에 기여한다.
(친한 직장동료) 여섯 명이 다 술고래들이었어요. 알코올 중독자들 지금 생각하면 우리 교감도 중독이고 하루에 소주를 두병 이상 안 먹으면 그건 안 되는 그런 분이었고, 우리 이사장도 마찬가지 고. (H)
제가 20일 만에 퇴원을 하는데 그 의사선생님이 중독이라는 설명을 해 주지 않고 '술 조금만 주세요' 라고 해서 보낸거예요. 그래서 저는 적게 먹으면 되는 줄 안거죠 (G)
붕괴되어 가는 삶
연구참여자들은 음주의 지속과 중독의 진행과정에서 삶의 중요한 결정과 실행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부정적 경험의 증가와 일상의 점진적 붕괴를 경험한다. 일상의 붕괴는 건강악화를 비롯해 직장의 위기, 가족의 갈등과 해체, 사회적 관계에서의 고립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한다.
술독에 빠지면서 정말로 말도 없이 실수도 많았고, 00 근무할 때도 상사 두들겨 패는 건 한 두 번이 아니고, 근무 빠져먹은 건 예사야. 그냥 술이 취해갖고 사무실에서 자는거야. 그러구 깨면 가서 누구를 하나 꼬셔갖고 가서 또 술 먹고 있고. (G)
그 때쯤 이제 제가 무혈성 괴사. 녹아서 양쪽이 다 왔어요. 2007년에 부종이 한번 왔었어요. 피부가땡겨서 걷지를 못할 정도로. 찢어질 거 같아가지고. 근데 그게 이제 혈관이 막힐 징조였었죠. 나중 에 본스캔을 하기로 했었는데 그냥 취소해 버리고. 그 때 만약에 했으면 만약에 나왔을 수도 있어 서 뭔가 대처를 할 수 있었을텐데 그냥 그대로 괴사 된 상태로 주욱 간거죠 (C)
중독의 끝에서 중독자인 부모를 만나다
부정과 합리화를 동반한 지속적인 음주에도 위태롭게 유지되던 삶은 어느 순간 중독이 가속화되며급격히 무너진다. 연구참여자들은 가족으로부터의 극단적 외면이나 단절, 정신병원 입원, 심각한 금단 증상과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며 바닥을 치게 된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슈퍼 가서 한 병 마시고, 또 막 무작정 목표 없이 걸어 다니다가 술 깨면또 한 병 마시고. 그러다가 밤 되면 집에 들어가고. 그렇게 살다 보니까 나중에 쓰러지더라고. 또 피를 토하더라고.(B)
아 얘들 내가 없으면 잘 살겠다. 귀신들이 내가 죽으면 잘산다고 하니까 현실이 그게 보이는 거예요. 애들 고생 시키는 게 보이니까. 그래가지고 자살(시도)를 했어요.(F)
어느 순간 연구참여자들은 자신이 중독자인 부모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왔음을 인식하게 된다. 중독의 진행과정에서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고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자위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연구참여자들은 결국 중독자인 부모와 닮아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버지와) 똑같은 건 도피처로 삼는 건 똑같구. 뭔가 내가 막 그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되게 자신감없고 힘들 때 찾은 거 같애요. 똑같죠. 그거는 아빠도 뭔가 자기 자신이 되게 초라하게 느껴 질 때 마셨던 거고. 그러구 저도 그렇구. (A)
4)단주를 통한 일상으로의 귀환
단주라는 관문의 통과
연구참여자들은 단주라는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일상의 세계로 귀환한다. 이들은 바닥을 치는 경험을한 후 자신의 삶을 위한 다른 선택, 즉 단주를 시도한다. 이는 더 이상 중독자인 부모의 뒤를 따르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3일 만에 병원에서 깨어나서 4월이었어요. 그 때. 개나리꽃이 노랗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개나리꽃을 내년에 다시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술을 안 먹어야 되잖아.(G)
회복으로 이끄는 주변의 조력
연구참여자들에게는 단주 선택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외부의 지원이 있었다. 입원을 통한 술과의 격리, 건강 회복을 통한 희망, 자신을 믿어주고 지원하는 이들의 격려 등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이들에게 불가능해 보였던 회복을 시작하는 힘이 된다.
내 아내가 나를 병원에 넣지 않고 그냥 방치 해뒀다. 진작 죽었겠죠. 그것에 대한 내 아내에 대한고마움 지금은 잊지를 못하죠.(B)
요 앞에 사는 멤버가 있어. 집에 내려가면 죽는다 AA다니려면 청주에 내려가면 죽는다. 하도 걱정을 하니까 자기집에 같이 있자고 그러더라고 자기도 혼자 있다고 일차적으로 회복하게 도움을 준 그 사람이 내 은인이에요(F)
회복 이후 이들이 만난 사람들과 세상은 이들에게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환경과 삶의 규칙,회복 동료를 제공한다. 연구참여자들은 새롭게 주어진 삶의 규칙과 구조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상을 재 배치하며 사회와 통합을 시도한다.
지금은 진짜 다 만나는 사람들이 다 술을 그렇게 막. 예전에는 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 밖엔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항상 그게 고민이었어요. 술 안 먹고 무슨 재미로 만나고, 어떻게 대인, 인간관 계를 어떻게 만들지? 근데 지금 보면서 술 안 마시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D)
상처를 간직한 귀환
연구참여자들의 회복과정은 중독자로서의 회복과 중독자 자녀로서의 회복이 혼재되어 드러난다. 중독자 자녀이자 중독자로 살아온 시간의 결과로 이들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여러 이상(異常)을 발견 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지는 회복 과정에서의 현실적 어려움은 그간의 삶에 대한 후회와 허망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재발의 위험 역시 이들에게 상존한다.
저는 내가 한 남자의 아내로서 남자를 사랑하는 법도 몰랐고, 자신이 없고, 거기에다 플러스로 자식을 낳아서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하니까 두렵죠. (중략) 온기가 없는 집을 들 어갈 때 나 뭐하고 살았지? (E)
지금도 제가 제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재발이예요. 한번도 재발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술을끊으면서 어려운 상황이 없지는 않았어요. 저도 몇 번 있었고, 심리적으로도 힘들고 했었는데 (중 략) 앞으로 더 힘든 일들이 있을 거 같애요. (H)
과거와 현재의 통합
연구참여자들은 중독과 회복의 과정을 통해 중독이 자신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깨닫고 이를 자신의삶을 통합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연구참여자들은 중독과 회복의 과정에서 깨닫게 된 삶의 의미를 현재에 적용시키며 새로운 시선으로 부모를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중독자 자녀로서, 중독 자로서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저 분들도 나를 사랑했구나. 저는 그전에는 나라는 존재가, 그니까 그전에는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있다는 생각을 안 해봤거든요. 특히 아버지가. 맨날 때리기만 하고 욕만 했으니까. 제가 마흔 살 때 그 사실을 안거죠, 그러면서 제가 아마 살아가는데 의미가 다시 생겼을 거예요. (E)
이러한 이해와 새로운 관계맺음은 부모와의 건강한 경계의 설정, 즉 분리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평온함에 기반하고 있다. 중독자인 부모에 대한 이해는 확대되지만, 그들에 대한 태도에는 ‘냉정한 사랑’ 의 실천이 나타나고 있다.
아빠에 대한 마음은 안쓰러운 건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아요. 본인이 의지가 없는 이상 가족들이 아무리 보내도 그런 노력이나 의지 없다면 저도 누가 해 줄 수 없다는걸 알기 때문에 (중략)만약 AA모임 안다니고 그런 어떤 의지가 없다면 (아버지와) 같이 살 생각은 없어요.(A)
회복이라는 전리품으로 회복을 돕다.
모험으로부터 귀환하는 영웅이 가져온 전리품으로 세상을 구원하듯, 연구참여자들은 자신의 회복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이러한 활동은 이들이 회복을 지속하는 힘 이 되기도 한다.
저도 지금 사회복지 공부 하고 있어요. 그래서 청소년기 힘들었어서 청소년문제 이쪽을 하고 싶어서 공부하고. 일은 카페를. 커피를 배우는게 사실 이렇게 카페를 차려서 거기서 이제 청소년들이 재활도 하게 그게 목표기는 한데. (D)
나는 봉사활동파예요. 계속적으로 봉사활동을 하죠. 그걸 하면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더 분발해야 되겠고. (H)
2.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중인 알코올 중독자 자녀의 생애 경험의 의미 구조 - 상처입은 영웅의 모험과 귀환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原質神話 monomyth)의 핵심 nuclear unit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 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 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p 44)”
연구참여자들의 삶의 궤적은 ‘신화적 영웅의 3단계 모험1)’을 따르고 있다. 연구참여자들은 일상이 붕괴된 유년기를 지내며 술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다가간다. 첫 음주를 시작으로 중독이라는 거대한 세력 과의 사투가 시작되고 이로 인한 다양한 시련을 경험한다. 하지만 결국 술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단 주라는 관문을 통과한 후 회복을 통해 일상의 세계로 복귀한다.
“원질신화의 복합적인 영웅은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 영웅은 사회의 존경을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거나 경멸을 당하기도 한다. 영웅과 (혹은) 그가 속한 세계는 상징적인 어떤 장애로 고통을 받는다.” (p 52)
연구참여자들의 유년기는 비일상성이 지배하는 고단한 일상이다. 부모의 음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비일상적 환경 속에서 이들은 고통과 예외적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은 부모의 음주 로 인한 결과이지만 이후 자신의 음주로 다가서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신화 속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영웅은 길을 안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나다.”(p 316)
연구참여자들의 환경에는 중독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힘이 존재한다. 중독에 익숙해진 가족력과 환경은 연구참여자들을 중독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첫 음주를 통해 자신의 중독이라는 또 다른 세상의 문턱을 넘는다.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조력자). 신화적 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絶大)한 시험을 당하고.”(p 317)
음주의 지속을 조력하는 환경에서 이들은 술로 인한 일상의 붕괴를 경험해 가다 결국 그 끝에서 죽음에 직면하는 경험을 한다. 이들은 죽음과 회복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회복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연구참여자들은 회복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존재를 만나 게 된다.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絶大)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중략) 이 승리는 자기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장). (중략) 영웅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은 세상 을 구원한다.”(p 317)
연구참여자들은 중독의 끝에서 단주를 선택하고 회복이라는 보상을 받게 된다. 술을 끊기로 결심하며 현실의 문턱을 넘어 일상과의 재통합을 시도한다. 이들은 회복을 통해 자신과 가족, 과거와 현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다른 중독자의 회복을 지원하고 가족관계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는 상처 입은 귀환이다. 이들의 회복은 중독자 자녀로서의 무 게와 재발이라는 두려움과 공존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의 회귀는 완전한 회귀가 아닌, 언제든 다시 중 독의 지하 동굴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부 회귀이다. 때문에 이들은 이 세계에서 뿌리 내리기 위한 노력 을 계속한다. 이 노력은 타인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이 구원 받고, 자신이 구원 받음으로써 타인이 구원 받는 자조(自助)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Ⅴ.결론 및 논의
본 연구의 목적은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로서 자신 역시 알코올 중독을 경험하고 현재 회복 중인 회복자들의 생애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부 또는 모, 혹은 부모 모두가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자신 역 시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 중인 회복자 8명의 심층 면담 자료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이상한 나 라에서의 어린 시절>, <중독으로 이어진 길>, <중독이라는 지하세계 모험>, <단주를 통한 일상으로 의 귀환>의 주제로 범주화되었다. 연구참여자들은 중독 가정의 자녀로서 경험한 결손과 중독 과정에서 의 고난, 그리고 회복을 통한 성장을 기반으로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성숙해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근거로 알코올 중독의 세대전이를 예방하 고 자녀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논의 및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알코올 중독 가정의 특성과 요구에 특화된 부모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적극적 시행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부모는 양육자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교사, 모범자, 훈육자로서의 역할 역시 담당하는 존재이다[15]. 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 드러난 알코올 중독 가정의 부모는 이러한 역할과 기능에서 실패 하고 있었고, 음주를 비롯한 다양한 삶의 방식에서 왜곡된 규범을 전달하고 있었다. 지지나 일관성 있 는 훈육 제공의 실패는 중독자 부모 뿐 아니라 중독자가 아닌 부모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그림자(연구참여자 H)’나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깍두기(연구참여자 D),’ 또는 ‘벗어나기 힘든 굴레 (연구참여자 A)’로 인식될 만큼 부모의 존재감은 부정적이다. 이는 부가 문제 음주자인 경우 부와 모 가 모두 부적절한 부모 역할을 많이 한다는 기존 연구[7])와도 일치하는 결과이다. 이러한 왜곡된 규 범 전달과 자녀의 음주에 대한 부정적 대처라는 방식은 음주와 중독의 진행과정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알코올 중독 가정 부모들에 대한 체계적인 부모 교육의 개발과 제공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부모의 사회적 지지, 일관성 있는 부모의 훈육은 자녀가 술이나 약물을 사 용하는 것으로부터의 보호 요인[17]인 만큼 알코올 중독 가정의 부모가 적절한 부모 역할을 할 수 있 도록 지원한다면 알코올 중독의 세대전이를 예방하고 자녀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알코올 중독자 자녀의 원가족으로부터의 분리와, 이들에게 대안적 부모 역할을 제공할 수 있는건강한 관계망 형성이 필요함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를 위한 전문가 훈련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본 연 구에서 가족 문제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삶의 경계를 분명히 했던 알코올 중독자 자녀들이 오히려 건 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이 발견되였다(연구참여자 C, E) 또한 회복의 과정에서 연구참여자들은 부모와의 건강한 분리를 시도하고 있었다(연구참여자 A, D, E, G, H). 이는 알코올 중독 가정 자녀의 적응 과정 의 핵심범주가 ‘부모의 알코올 문제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자아를 재정립함’[13]이라는 기존 연구결과 와도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건강한 분리는 대안적 부모 역할을 제공하는 역할 모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긍정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동안 술과의 거리를 유지했거나(연구참여자 A, G), 반대로 가 족을 대신해 구축한 관계망에서 오히려 술에 노출되었던 경우(연구참여자 C, D, F)를 통해서도 건강한대안적 역할 모델과 관계망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대안적 부모 역할은 교사나 종교 지도 자 등 이들을 자주 접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전문가가 적절할 것으로 사료된다. 때문에 이들 전문 가들을 대상으로 중독자 자녀에 대한 조기 발견과 예방적 개입을 위한 훈련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그 들과의 건강한 관계망 형성이 가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알코올중독자 자녀들 은 원가족으로부터 건강하게 분리되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셋째, 알코올 중독자 자녀에게 술과 중독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규범을 가질 수 있는 교육 의 제공이중독의 세대전이를 막는데 필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술이 일상이자 중독이 만연한 환경에서 성장하면서도 술과 중독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가 부족한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었다. 술과 중독 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이들의 중독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부모와 비교해 자신의 중독을 부정하거 나(연구참여자 A, D), 잘못된 대처를 하도록(연구참여자 D, E, G, H)함으로써 중독의 진행 억제에 실패 하고 있었다. 이에 알코올중독자 자녀가 술에 대한 적절한 지식과 규범, 그리고 부모가 갖고 있는 중독 이라는 문제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성인기의 알코올 중독을 예방하는데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연구참여자들은 자신의 중독 경험과 회복의 과정을 통해 중독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중독자 인 부모와의 화해는 물론 그들과 적절한 경계를 통해 자신의 회복과 정체성 수립에 긍정적 영향을 경 험한다. 이에 알코올중독자 자녀가 중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는 것은 이들의 삶의 질은 물론, 중독 의 세대전이 예방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현재 중독자 치료재활 중심의 중독 개입이 가족, 특히 자녀에게로 보다 확대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의료기관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나 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도 자녀에 대한 개입은 여전히 미흡한 현실이다. 하지만 문제의 발생 이전에 예방이 중요하며, 특히 중독 자 자녀들에 대한 초점화 된 예방적 개입이 필요하다. 이에 중독 문제의 예방을 위한 정책적, 제도적 보완과 함께 그 대상으로서의 중독자 자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다섯째, 본 연구를 통해 회복의 과정에서 다른 중독자의 회복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회복을 공고히하며,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양식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회복자가 다 른 중독자의 회복을 돕는 전문가 또는 준전문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양성하고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를 통해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전문인력의 활용이 가능할 뿐 아니라, 중독에 대한 인식 개선과 중독문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가능해질 것으로 사료된다.
본 연구는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로서 자신 역시 알코올 중독을 경험하고 현재 회복중인 회복자들의삶을 생애사적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내부자적 시각에서 이들의 삶과 적응 과정을 살펴보았다는 점, 은 유적 글쓰기를 통해 이들의 생애 경험에 대한 긍정적이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는 점, 그리고 알 코올 중독 세대전이에 대한 개인중심적 문제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 가족 및 사회환경적 차원에서의 관 점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실제적이고 정책적인 접근을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 다. 무엇보다 알코올 중독 발생의 고위험군이라 할 수 있는 알코올 중독자 자녀에 대한 사후 개입과 치 료보다는 예방적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연구를 기반으로 알코올중독 가정을 위한 부모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에 관한 후속 연구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