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다양한 중독의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주요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중 알코올중독은 평생유병률 11.6%로, 특히 남성의 경우 여성의 3.3배인 17.6%(국립정신건강센터, 2022)인 가장 만연한 중독문제이다.
알코올중독은 가족병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알코올중독 가정에서 성장하는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부모의 알코올중독은 유전적 또는 환경적으로 자녀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영향력이 성인기까지 지속될 수 있다(유채영, 2000). 그 결과 알코올중독 가정의 자녀들은 그들만의 공통된 문제를 갖게 되는데 이는 전문가의 적절한 개입·치료 및 중재로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김보람, 2019). 알코올중독자 뿐만 아니라 가족, 특히 자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알코올중독가정 자녀의 공통적인 문제 중 하나는 대인관계 문제, 특히 친밀한 관계에서의 어려움(김혜련 외, 2004)이다. 친밀한 관계는 삶의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여기에는 원가족에서 습득하고 발달시켜 온 다양한 특성과 사회기술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한다(강향숙, 2013). 때문에 원가족에서의 관계가 현재의 친밀한 관계인 결혼 관계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여러 이론적 관점을 가진 학파에서 지지되고 있다(차정화, 전영주, 2002). 특히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계 지향적 성향이 높기 때문에 원가족에서 부모와의 관계로부터 겪은 부정적 경험은 배우자와의 갈등이나 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유계숙, 김보람, 2018). 실제로 이성 부모의 중독은 자녀에게 영향을 주어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은 자녀인 여성의 부부간 낮은 친밀감과 관련이 있다 (Kearns-Bodkin & Leonard, 2008)고 알려져 있다. 또한 결혼 관계에서의 갈등으로 결혼생활의 질과 만족도는 떨어지고, 낮은 결혼 안정성을 보인다(Domenico & Wimdle, 1993;Watt, 2002).
이들의 결혼관계에서의 어려움은 단순한 부부갈등이나 만족도 저하의 문제만이 아니다. 부모의 알코올중독이라는 영향력 아래 성장한 이들은 성인이 되어 형성한 새로운 가정에서 또 다른 알코올중독을 경험하게 된다. 알코올중독자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는 자신이 알코올중독자가 될 위험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알코올중독자와 결혼할 가능성도 높다(유계숙, 김보람, 2018). 특히 알코올 중독자의 딸은 또 다른 알코올중독자를 만나 알코올중독자의 여성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김수진, 2002). 이는 부모가 알코올중독자인 기혼여성이 그렇지 않은 기혼여성에 비해 배우자인 남편이 알코올 중독일 경향이 높다는 결과(김보람, 2019)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알코올중독자의 딸이 배우자의 선택과 결혼생활에서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알코올 중독 가정에서의 역기능적 역할 유형을 반복하는 부적 응적인 선택(김명아, 2001, 박현선, 2001, 이선화, 2004, Bantz, 2003)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혼은 알코올중독자 자녀의 삶의 질을 떨어트릴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역기능적 가족환경을 만들어 냄으로써 또 다른 알코올중독 세대전이의 중간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알코올중독자의 자녀가 알코올중독을 경험하는 중독의 세대전이 연구(강향숙, 2015)에서, 또 다른 알코올중독자 자녀인 배우자의 부정적 대처가 알코올중독 진행을 부추길 수 있다는 연구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알코올중독자의 딸은 성인기에 또 다른 알코올중독자 배우자를 만나 알코올중독 가정을 형성하고, 배우자의 알코올중독 진행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조력자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알코올중독자의 자녀가 알코올중독자가 되는 형태가 아닌, 알코올중독자의 자녀가 알코올중독자의 배우자가 되는 또 다른 형태의 알코올중독 세대전이라 할 수 있다. 가족병이라 알려진 알코올중독은 가족간의 역동을 살펴보고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면에서 부모에서 자녀로 이어지는 알코올중독의 직접적인 세대전이 뿐 아니라 보다 확장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이 딸을 통해 또 다른 알코올중독 가정으로 이어지는 세대전이에 대한 이해는 아직 많이 부족한 현실이다. 알코올중독을 가진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의 결혼생활에 대한 연구, 특히 알코올 문제의 세대 간 전이의 양상을 보여줄 수 있는 기혼여성 ACOA를 대상으로 부모의 알코올중독 여부와 배우자의 알코올중독 여부를 함께 살펴본 연구는 많지 않다(김보람, 2019). 기존의 연구들은 이들의 성장 과정이나 결혼 과정, 결혼생활 등의 특정 시점이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진행됨으로써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결혼생활까지 이어지는 경험의 단편적인 이해만이 가능하다. 이에 알코올중독가정의 자녀가 결혼을 통해 또 다른 알코올중독 가정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전생애적인 경험을 통합적이고 다각적으로 깊이 있게 이해하고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생애사 연구는 참여자가 살아온 삶의 경험을 구술하고 그 맥락에서 갖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는 연구 방법으로, 하나의 총체로서 개인이 살아온 삶의 경험에 초점을 두면서 온전히 이야기로 만들어 나간다 (Atkinson, 1998: 김영천, 한광웅, 2012 재인용).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의 과정은 물론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삶을 구성해 나가는 한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생애사 연구 접근은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자인 가정에서 성장하여 현재 알코올중독자의 배우자로 살아가는 연구참여자들의 삶을 통해 세대 간에 전이되는 알코올중독 가정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자이면서 동시에 현재 배우자가 알코올중독자인 여성 ACOAs의 생애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개개인의 삶의 경험에 초점을 두면서 이들이 직접 구술하는 경험을 통해 그 맥락에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사회적인 안목에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적응을 하여 살아가는 여성의 삶의 경험, 생각, 느낌 등에 공감(김영천, 한광웅, 2012)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적절한 개입치료를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 중독가정 세대전이의 예방, 중독가정 자녀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Ⅱ. 연구방법
1. 연구방법
본 연구는 질적연구방법 중 생애사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였다. 질적연구는 연구참여자들의 문제나 이슈의 의미를 학습하는데 초점을 두며, 다양한 관점들을 보고하고, 상황에 관계된 많은 요인들을 확인하며, 이를 통해 드러나는 더 큰 그림을 전반적으로 그려줌으로써 연구 중인 문제나 이슈에 대한 복합적 묘사를 발전시킬 수 있다(Creswell, 2015). 그 중 생애사 연구는 사회적 조건에 따른 개인의 변화과정을 포착하는데 유용한 방법론이다(이동성, 2015).
본 연구에서 생애사 연구 접근을 활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의 목적은 알코올중독자의 자녀이자 배우자인 여성의 삶의 총체적인 경험을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이다. 자연스러운 상황에서의 면담을 통해 이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로 들려줌으로써 이들이 살아온 삶의 경험, 생각, 느낌 등에 공감(김영천, 한광웅, 2012)하고자 한다. 둘째, 연구참여자들의 개별적인 삶과 더불어 사회와 개인의 역동적 상호작용이 삶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생애사 연구는 인간의 행위가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 다른 행위자들과의 의미 있는 관계, 상호작용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관계성을 특징으로 한다(이동성, 2015). 또한 개인적인 인생 이야기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로 한 여성의 인생 이야기는 주관성만이 아닌 객관성을 갖는다(박성희, 2002)는 관점에 기반한다. 생 애사 연구를 통해 알코올중독자의 자녀이자 배우자인 여성의 삶을 사회적 구조와 연결하여 사회적 조건에 따른 개인의 변화 과정을 이해하고자 한다.
2. 연구참여자
연구참여자의 모집은 연구자가 이론적으로 연구에 풍부하고 질 높은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참여 자의 기준을 정하고 이에 부합되는 연구참여자를 선정하는 이론적 표집(theoretical sampling)의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지역사회의 회복센터와 중독자재활시설, 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 등 관련 기관에 협조를 요청하고, 연구에 대해 안내하고 연구참여자를 모집하는 모집공고를 활용하였다.
본 연구에서의 연구참여자는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자이자, 동시에 현재 배우자가 알코올중독자인 여성 3명이다. 구체적인 선정기준은 첫째,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자인 여성이다.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에 대한 주관적 인식과 동시에, 한국판 알코올중독자 자녀 선별검사 도구(Korean version of Children of Alcoholics Screening Test, CAST-K)에서 6점 이상을 받아 알코올중독자 자녀로 분류된 경우이다. 둘째, 현재 동거 중인 배우자가 알코올중독자인 여성으로, 배우자가 알코올중독(알코올사용장애 또는 알코올의존) 진단을 받고 입원 또는 외래치료를 받는 중이거나 받은 경험이 있는 경우, AA나 중독 관련기관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거나 참여한 경험이 있는 경우로 하였다. 셋째, 자신의 생애 경험을 언어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으며, 연구목적에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로 하였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선정된 연구참여자에 대한 내용은 <표 1>에 제시되었다.
3. 자료수집
자료수집은 연구참여자와의 개별심층면담으로 2022년 10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진행되었다. 연구 참여자 1인당 2회의 면담을 진행하였고, 연구참여자 1은 2023년 2월과 3월 각 1회, 연구참여자 2는 2022년 10월과 2023년 2월, 연구참여자 3은 2023년 2월과 3월 각 1회 진행되었다. 1회 면담 시간은 120분 정도 소요되었다. 장소는 연구참여자들이 원하는 장소로 정하여 연구참여자의 직장 사무실 또는 집이나 직장 근처 카페에서 진행하였다. 대면이 어려운 경우 원격화상회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심층면담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당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라는 개방형 질 문으로 시작하여 참여자의 진술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는 질문을 통해 개방적이지만 초점을 잃지 않는 반구조화된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와 장년기 등 생애과정별 경험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또한 원가족에서의 성장 경험과 배우자와의 결혼 과정, 결혼생활과 지금 현재의 삶에 대하여 삶의 주요 시기별 기억과 의미를 회상하고 정리해 나갈 수 있는 질문을 통해 면담을 진행하였다. 면담의 전 과정을 녹음하고 이를 전사하여 녹취록을 작성하였고, 이 외에 연구참여자의 표정이나 태도 등 의 비언어적 자료와 함께 심층면담 진행 중 연구자의 이해나 성찰의 내용에 대한 현장노트를 작성하여 분석에 활용하였다.
4. 자료분석
자료분석은 먼저 연구 참여자의 개별 생애과정을 분석하고, 다시 사례간 통합분석을 통해 삶의 역동성과 패턴을 보고자 하였다. 이를 Mandelbaum(1973)의 분석틀인 삶의 차원(dimensions), 전 환(turnings), 적응(adaptation)으로 범주화하였다. 삶의 차원은 삶의 주된 영역을 이해하기 위한 범주를 제공하는 것으로,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특별한 사건이나 경험, 환경을 이해할 수 있다. 삶의 전환은 개인의 삶에서의 주요 변화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삶에서의 경계가 되는 기간을 보여준다. 삶의 적응은 삶의 차원과 전환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대처하는지 분석함으로써 삶에서의 변화와 지속에 모두 초점을 맞추어 적응의 이유와 방법 등을 살펴보는 과정이다(Mandelbaum, 1973). 본 연구에서는 삶의 영역에서 연구참여자들의 삶의 경험을 양육 환경과 관계, 그리고 자아개념 등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전환‘에서는 연구참여자들이 원가족을 벗어나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형성하는 과정과, 아버지와 배우자의 중독과 삶의 역기능에서 벗어나 회복을 시작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적응‘은 자기 삶의 건강한 회복을 향해 가는 변화 과정에서의 전략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5. 윤리적 고려
본 연구는 연구참여연구자에게 연구참여자 모집공고를 통해 연구의 내용과 목적을 밝힌 후 자발적인 참여 의사를 밝힌 경우 동의를 구하고 진행되었다. 연구 참여자들은 자발적 참여, 피해, 비밀보장 이슈들이 모두 기술된 연구설명서를 함께 읽고 설명을 들었으며, 이후 동의하는 경우 직접 동의서에 서명하였다. 이후에도 참여의사를 철회할 경우 그만둘 수 있음을 설명하였고, 연구와 관련된 질문에 답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심층면담 진행 후 연구 참여에 대한 사례로 사전에 안내된 대로 상품권을 제공받았다. 본 연구는 남서울대학교 생명윤리심의위원회 심의(남서울대학교 1041479-HR-202205-002)를 거쳐 승인을 받았다.
Ⅲ. 연구결과
1. 연구참여자 개별 생애사 구성
1) 연구참여자1
1960년대 2남 3녀의 넷째로 태어났다. 큰언니의 눈에는 손재주도 있고, 잘생긴 아버지였지만, 연구 참여자1의 눈에는 그저 무섭고 생활력 없는 아버지였다. 어머니 역시 무기력하고 우울하여 연구참여자 1을 보호해 줄 만큼 든든하지는 못했다. ‘저 집 딸들은 왜 가출도 안해’라는 이웃의 말을 들을 정도로 알코올성 치매를 앓던 아버지의 횡포가 심했지만, 알코올중독이라는 인식 없이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고 순하게만 자랐다. 오빠가 가장 역할을 하며 어렵지 않은 경제적 상황이었지만, 부모가 가장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심리적으로는 빈곤감을 느끼며 생활력 강하게 자랐다. 무능하고 자식에게 의존적이었던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돈에 집착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남동생과 비교되며 들은 “쓸모없는 딸년”소리는 뭐든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남자를 사귀어 본 경험 없이 20대 중반에 결혼했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박함이 결혼을 재촉해 선을 본 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결혼 전 나름의 조건들을 충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고, 남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결혼했음을 곧 알게 되었다. 이후 자녀 둘을 낳고 살면서도 자신의 두려움과 욕구가 투사된 왜곡된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삶은 여의치 않았고, 남편의 음주는 심해져만 갔다. 그래도 지옥 같았고, 마음 의탁하기 어려운 친정보다는 남편 곁이 그나마 낫다 싶어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남편의 음주와, 부모와는 다르게 살고 싶은 절박함으로 살길을 찾아 헤매었다. 그리고 교회와 회복모임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남편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라는 가르침에 자기 문제를 성찰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배워가며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결혼으로 내려놓았던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고 있고, 여행이나 공동체 모임을 통해 남편과 분리된 자기 삶에 충실하려 한다. 어린 시절 하지 못했던 공부도 시작해 늦은 나이지만 대학을 졸업하였다. 과거 트라우마가 투사되며 ‘나쁜 놈’, ‘무서운 놈’으로만 보였던 남편이 알고 보니 순하고 다정한 사람임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고,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며 관계도 변하고 있다. 몇 번의 입퇴원 후에도 여전히 가끔 술을 마시는 남편이지만 내 삶에 충실할수록 남편 역시 자기 삶을 스스로 지탱해감을 관찰한다.
2) 연구참여자2
1960년대 2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시끄러운 집안 분위기가 동네 창피하기도 했지만, 다른 집에 가본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몸이 약해 학교를 못 가는 날도 많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애틋함이나 친밀감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던 부모님이었고, 그저 집 안에서 조용히, 없는 듯 시간을 보냈다. 아들이 우선인 사회와 가족 분위기에서 장남을 유학 보내려면 딸들의 희생이 있어야 했다. 빨리 취업해 돈을 벌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해 전문대로 진학하고 졸업 후 바로 취업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일은 힘겹기만 했다.
노처녀라는 압박감과 불안에 더해, 원가족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며 결혼을 선택했다. 상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 만난 지 한달 만에 급하게 진행된 결혼이었다. 결혼 전 이미 남편의 음주 양상이 심상치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 같으나, 적극적으로 결혼을 막지 못하고 이끌려 갔다. 결혼만 하면 삶이 완전히 달라져 행복해질거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결혼생활은 힘들었다. 결혼 전 전해졌던 남편의 조건은 실상과 달리 과장되어 있었고, 특히 시댁에서 급하게 결혼을 서둘렀던 이유로 짐작되는 남편의 음주 문제는 신혼 초부터 심각했다. 두 자녀를 낳고 살면서 남편은 생계를 뒤로한 채 음주에 빠졌고, 시댁에 의탁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친정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혼도 여의치 않았고, 시댁 어른들의 반대로 남편의 입원 치료의 시도가 좌절되기도 하였다.
답답하고 무의미한 삶을 벗어나고자,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이전 직종으로의 재취업을 시도하였다. 그렇게 집을 벗어나 직장을 다니며 교회와 자조모임, 회복공동체에 참여하여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었다. 돈을 벌면서 스스로 당당해지고, 교회와 자조모임, 회복공동체에서의 관계와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정보와 삶의 방식을 배워 나가기 시작하였다. 꾸준히 교육에 참여하며 비협조적이었던 시댁 어른들을 설득해 남편의 입원치료를 시도하고 유지할 힘도 생겼다. 무조건적인 분노와 원망에서 남편을 이해하고 대처방식을 바꿔나가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회복 공동체에서의 나눔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남편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알코올중독자로 칭하는 것이 여전히 죄책감 들고, 퇴원 후 술은 안 마시지만 집에만 칩거하는 남편에 마음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활발하고 바쁘게 넓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에 감사하고 있다.
3) 연구참여자3
1960년대 딸 많은 집 귀한 외아들의 바로 아래 딸로 태어나 ‘쓰잘데기 없는 딸’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오빠와의 차별을 시샘할 여지도 없이 ’구경꾼‘처럼 순하고 착한 딸로만 살았다. 알코올중독이 심화 되던 아버지 모습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그저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에 억눌린 채 억척같이 아들만 챙기고 자신에게 무심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많았다. 집안의 자랑이자 마을의 기대주였던 오빠 옆에서 그저 ’누구 동생‘이라는 존재감에 만족하며 자기 삶의 주인공이기보다는 오빠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받았고, 스스로도 그렇게 다짐했다. 그렇게 오빠의 성공을 통해 자기 삶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였으나 그 꿈이 좌절되며 자신의 삶 전체가 암울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이후 자신을 대신해 자기 삶을 완성해 줄거라 기대한 또 다른 대상이 지금의 남편이었다. 30대 늦은 나이에 오빠의 모습이 투사된 남편을 만나 오빠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자기 삶의 완성을 남편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동기로 남편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정작 남편의 실제 모습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결혼 이전부터 남편의 음주를 비롯해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자신의 기대를 투사한 채 눈을 감아 버렸다.
결혼 이후 두 아이를 낳고 살면서 남편의 건강 문제와 사업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와 함께 남편의 음주 역시 점차 심각해지면서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성’인 자신 대신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 줄 대상인 ’남성‘에 대한 동경과 기대,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과 분노, 무시가 남편을 향했다. 하지만 점점 심해지는 알코올중독과 건강문제, 경제적 어려움, 갈등 속에서도 이혼을 고려하거나 주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어렸을 때부터 그랬듯 혼자 생각하고 혼자 감당해 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산 밑에라도 들어가서 비를 덜 맞고 그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성당을 찾아 신앙에 매달리고,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고자 자조모임과 회복 프로그램을 순회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상황을 변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런 저런 교육을 받고 계속해서 돌파구를 찾고자 고군분투하였다. 늦게나마 대학에 진학해 공부도 하였다.
촤근 들어 교육과 자조모임 동료들과의 나눔을 통해 남편보다는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나는 남편에게 어떻게 하였나?’ 등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직면해 가고 있다. 남편과 자신의 모습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남편의 좋은 점과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무엇 보다 남편을 통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한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삶이 달라 질 수 있음을 시인하였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자녀들에게 엄마 노릇은 제대로 하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켜가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2. 연구참여자 생애사 통합 분석
1) 삶의 차원
(1) 혼자 커버린 애어른
연구참여자들은 부모 아닌 부모의 부모 역할 부재 속에 적절한 보호나 보살핌 없이 성장하였다. 이들에게 아버지는 가장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존재이거나, 무섭고 낯선 존재였다.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이나 갈등으로 각인되거나, 반대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듯 흔적 없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인식된다. 어머니 역시 자식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이거나 딸이라는 이유로 자식에게 무관심했던 원망스러운 존재로 기억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가 부모 역할을 대신하거나, 스스로가 자신의 부모역할을 하며 성장하게 된다.
엄마는 무기력한 엄마, 무능한 엄마, 아버지는 무능한 아버지 그래서 나는 저렇게 무능하게 살고 싶지 않아.(연구참여자1:2023.02.03)
엄마는 나를 꾸지람 한다든가, 혼낸다든가, 일을 시킨다든가 이럴 때 빼놓고는 저한테 관심도 안 가 졌던 것 같고..(연구참여자3:2023.02.11)
부모로서의 보호나 양육 뿐 아니라 안내자의 역할 역시 부재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부모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를 받은 기억을 갖지 못하였다. 부모 자신의 삶을 감당하기 어려워 자녀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거나, 또는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 부모 역시 미숙했기에 연구참여자들은 그저 부모의 사는 모습을 답습할 뿐, 적절한 삶의 방향을 배워 가지 못했다. 그러기에 연구참여자들은 삶에 대면해 미숙하고 혼란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렇게 어리석게 살았을까에 대한 회한의 끝에 안내의 부재를 실감한다.
저는 혼자 스스로 컸어요. 엄마가 돌보고 오빠가 돌보고 했겠지만 제 생각에는 누구랑 의논을 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알아서 일처리를 한다든가. (연구참여자1:2023.02.03)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걸) 거의 못 배웠어요. 거의 못 배운거 같아요.(중략) 알려주는 건 붙잡고 ‘그래 니가 이렇게 해야 돼’ 그런 거잖아요. 근데 그런 건 거의 없었어요. 그냥 부모님들은 부모님들 살고, 자녀들은 그냥 그래 살고 그랬으니까. (연구참여자2:2022.10.03)
진정한 어른의 부재는 연구참여자들을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다. 이는 강요된 조숙(早熟)이었다. 어린 시절 연구참여자들은 온전히 기대어 보호받기에는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했던 부모 밑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꿈이나 의지, 욕구와는 상관없이 현실에 적응하며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이는 지금껏 충족되지 못하고 텅 빈 채 남아 있는 유년기의 공동(空洞)이다.
아버지가 돈을 벌지 않으니까 준비물 필요해도 돈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준비물 해 오라고 하면 안 해가는거야. 학교 갈 때. 그래서 욕구 표현을 하지 못했던게 지금 생각하면 속상하고 어린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구나. 참 얘기하면서 슬퍼요.(연구참여자1:2023.03.10)
(적성에 안 맞는 진로 선택 이유는) 그거는 돈 벌기 위해서예요. 직업을 갖기 위해서. 취업이 잘 되는 것 때문에 갔어요.(연구참여자2:2022.10.03)
(2) 고립무원(孤立無援)
연구참여자들의 집은 세상 속에 있었으나 세상과 유리(遊離)된 집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의 음주와 부모님의 갈등이 부끄러워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고립된 집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가족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갖지 못했다. 보지 않은 것이든, 보지 못한 것이든, 연구참여자와 가족들은 자신과 가족의 모습을 직면하고 세상에 드러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저 자신들만의 세상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이는 문제를 악화시키고 더욱 고립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아버지가 술 마시고 늘 방에만 앉아 있는게 창피하면서도 그걸 표현도 못하고 속으로만 힘이 들었어요. 힘이 든다.. 힘이 든다..(연구참여자1:2023.03.10)
(아버지의 음주나 부모님의 갈등에 대해) 다른 집은 모르겠어요. 제가 친구 집에 가거나 그런 적이 거의 없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별로 없었어요. (연구참여자2:2022.10.03)
혼자 감당하는 것이 익숙한 연구참여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는 것은 허락된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들은 삶은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 배웠고, 견뎌내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다. 결과적으로 연구참여자들은 어린 시절 뿐 아니라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세상 풍파에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삶의 문제에 직면할 때 이들은 도움을 구할 대상이나 의지도 없이 오로지 혼자 견뎌 나갈 뿐이었다.
우리 앞집 아줌마가 왜 저 집 딸들은 가출을 안 하냐고. 근데 가출을 할 능력이 되어야 가출을 하지 (연구참여자1:2023.03.10)
그럴 때도 남들하고 많이 의논하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나 혼자 알아서.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이렇게 했거든요. (연구참여자3:2023.02.11)
결혼 이후에도 혼자 견디는 시간은 계속되었다. 연구참여자들의 삶은 배수진(背水陣)에서의 고군분투(孤軍奮鬪)와도 같았다. 배우자의 알코올중독은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고, 극복하기 어려운 역경이었다. 하지만 배우자의 알코올중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피할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특히 자신의 원가족이나 배우자의 원가족은 가족임에도 도움이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막다른 상황까지 소진된 자신을 의탁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오히려 자신과 배우자의 문제를 은폐하려 애쓰기도 하였다. 연구참여자들에게 알코올중독자인 배우자의 옆은 힘들고 견딜 수 없는 곳이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에 버텨야만 하는 지옥이 되었다. 그곳에서 이들은 혼자만의 고군분투를 이어간다.
막 대변 소변 다 싸고 누워 자고 완전히 인간 이하.. 그렇게 사는거예요. 막 너무 힘들어하니까 올케 언니가 나보고 친정으로 오래. 근데 생각해 보니까 친정보다는 여기가 나아. 내 집이 더 나아. 친정이 별로 편하지가 않았어요.(연구참여자1:2023.02.03)
제가 그때 한번 진짜 더 못 살겠다 생각이 들어서 이혼 결심을 하고 친정으로 가고, 애는 이제 시댁에 있고. 있었는데 친정에 가 봐도 이게 편하지가 않더라구요. 아버지가 한 말이 생각이 나요. 힘들어서 왔는데 다시 돌아가라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나는 힘들어서 왔는데. 그래서 갈 데가 없더라구요. 갈데가 없어요. 갈데는 친정 밖에 없었는데 가니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저는 갈데가 없었어요. (연구참여자2:2022.10.03)
친정에도, 친구에게도 누구한테도 말 안 했죠. 시댁에도. 시댁에도 말 했어야 되는데. 지금 생각하면 우리 아주버님이 ’**(배우자)이가 돈이나 갖다 줘요? 월급 갖다 줘요? 잘해 줘요?‘ 이렇게 한번씩 묻는 거예요. 지나가는 말로.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걸 그냥 물어보는 말이 아니었는데 제가 그냥 웃고 넘기고 그랬거든요. 아무 말도 안 하고.(연구참여자3:2023.02.11)
(3) 주인공이 아닌 삶
연구참여자들이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는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이 존재하던 시대였다. 아버지의 음주와 혼란스럽던 가족기능 안에서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 있던 가족의 역량이나 관심은 아들에게 집중되었다. 아들, 특히 능력 있는 아들은 중독 가정의 좌절과 실패를 보상해 줄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는 딸이었던 연구참여자들은 귀한 존재인 아들의 존재감에 가려 관심과 존중을 받지 못했고, 자신의 욕구는 부정 당한다. 이들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이러한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주변인의 삶을 살게 된다.
할머니가 늘 뭐라고 그랬냐면 딸이기 때문에 아무짝에 쓸모 없는 년이래. 그러니까 나는 내 안에서 ‘나는 아무짝에 쓸모 없구나. 딸이기 때문에.(연구참여자1:2023.03.10)
저희 집은 아무래도 옛날부터 아들만 중시했거든요. 큰 오빠가 이제 공부도 잘하고 공부에 대한 욕심도 있고 해서 그때 외국에 유학까지 가고 이런 형편이다 보니까 여섯 자녀들을 다 학교보내기가 힘들잖아요.(연구참여자2:2022.10.03)
부모의 중독과 무능력, 갈등과 예측 불가능한 일상이 이어지던 집안 분위기는 연구참여자들에게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억압하고 숨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전략을 가르쳐 주었다. 두렵기만 한 아버지와 무능력한 어머니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드러내고 수용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 하였다. 거기에 더해진 남녀차별의 가족사회적 환경은 연구참여자들이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스스로도 부정하게 만들었고, 희생과 양보는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 된다. 이들은 순하고 착하다는 주변의 평가를 들었고, 자기를 챙기기보다는 주로 남성인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는 주변 의 기대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으로도 강화되었다. 양보와 희생이 몸에 밴 이들은 스스로를 돌보거나 존중받는 것이 미숙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불편함과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난 마음이 늘 가난한거야. 아버지가 돈을 안 버니까. 내 생각엔 우리 아버지가 돈을 안 버니까 ‘난 가난해’가. 학교 다닐 때는 준비물 해 오라는 걸 안 해갔어요. 보니까 돈이 안 보이니까.(연구참여자 1:2023.02.03)
권리가 없었어요.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기적이고 그러면 나쁜 년이니까.(연구참여자3:2023.03.26)
남편 만나기 전에 선 보고 몇 번 만나고 한 사람도 있었는데 내가 대접 받는 게 안 되어 있었던 거 같아요. 오빠만 대접 받고 난 쓸모 없는 딸 이러니까 어디 앉으려고 하면 나한테 손수건을 깔아주면서 앉으라고 하면 이런거 앉아야 되나? 그런게 너무 부담스러운. 나를 챙겨주면. 그런 거. 그러니까 나한테 그렇게 안 하는 사람이 편했던 거 같애. 내가 살아온 그런 거 때문에 (연구참여자3:2023.02.11)
주변인으로서의 생존전략은 의존이었다. 알코올중독자의 자녀로 성장하며 경험하는 존재감의 위축에 ’쓸모없는 딸‘이라는 차별까지 더해질 때, 이들은 자기 스스로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유능감을 갖지 못한 채 무력해진다. 그리고 타인에게 맹목적인 인정을 구하거나 타인의 존재에 기대어야만 자신의 존재감을 찾을 수 있다는 왜곡된 인식을 갖는다. 즉 남성에 대한 동경이나 의존적 태도를 갖게 함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를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지을 수 없는 존재로 무력화한다. 이는 결혼을 통해 만난 배우자와 그 가정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어줄 것이라는 과도한 기대나 환상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양보와 희생에 대한 무의식적 보상 요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대가 컸던 만큼이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분노의 타당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돋보이고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가는 걸 무의식적으로 거부를 했더라구요. 인정 은 받고 싶은데 그게 내 자리는 아닌 것 같은, 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 혼날 것 같고. (연구참여자3:2023.03.26)
제가 오빠를 통해 내 꿈을 이루려고 했는데. 못했는데.. 또 남편을 통해 그걸 이루려고 했는데.(연구 참여자3:2023.02.11.)
2) 전환점
(1) 결혼을 통한 맹목적이고 무모한 도피의 끝, 다시 제자리
연구참여자들은 결혼을 통해 원가족으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이는 대안 없는 선택이었다. 이들이 결혼을 선택했던 1980-199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이 원가족을 떠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선택하기 쉽지 않은 시기였다. 또한 일정한 연령대의 여성은 꼭 결혼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강요도 있던 시기였다. 그러기에 결혼은 이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삶의 변화를 위한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더구나 결혼을 통한 새로운 가족의 형성은 연구참여자들이 원가족에서의 결핍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기도 했다. 그 결과 이들은 원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도피성 결혼을 시도한다.
그때는 결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이런게 없고 결혼을 꼭 해야 된다 이런 생각 밖에 없었어요. (연구참여자2:2022.10.03)
집을 떠나서, 이렇게 지옥 같은 집이어도 집을 떠나서는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해 봤어요. 여자가 어딜 집을 떠나서 살아? 그리고 돈이 있어야 나가지. 그러니까 집을 벗어나는 건 결혼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중략) 벗어나고 싶어서 결혼한거죠. 100%, 100%예요.(연구참여자1:2023.03.10)
돌파구를 찾던 연구참여자들에게 결혼은 특별한 기대의 대상이 된다. 원가족에서의 좌절감이 큰 만큼 반대급부로서 결혼은 자신의 삶을 구원해주고 변화시켜 줄 환상적인 대안이 된다. 이전까지의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리셋하고 새로운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 과정에서 결혼 상대인 배우자 는 자신의 탈출을 위한 도구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완벽히 바꿔 줄 도구로 기대된다. 삶의 주체적 주인공으로서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연구참여자들에게 모든 기대를 투영한 결혼생활의 완성 주체는 자신이 아닌 배우자였다. 원가족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는 배우자의 존재 에 의지한 맹목적인 기대였다. 하지만 이는 충족될 수 없었던 비현실적이고 과도한 기대였다. 그리고 큰 기대만큼 더 큰 실망과 원망으로 이어진다.
결혼만 하면 내가 지금 사는게 180도 달라질거다. 행복할거다..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나이에도 현실을 모르고.. 그래 가지고 이제 친정에서 이제 그런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이제 하자. 그러고 갔는데 근데 가보니까 아닌거예요.(연구참여자2:2022.10.03)
(남편에 대한 기대가) 다방면으로 만능인 인간. 그러니까 우리 남편이 예전에 그런 말도 했어요. 너는 욕심이 한도 끝도 없다고.(중략)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그렇게 안 보고 티코 골라 놓고 그랜져 역할하게 그런 거처럼 티코 이걸 못 보는거예요.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용납할 수가 없는거예 요. 티코여도 그랜져가 되야 한다 이런거 있잖아요. 그런 걸로 계속 푸쉬를 하는거죠. 성당 가면 성당 가서도 만능인이 되어야 하고. 어디서나 내 남편은 다 잘해야 돼. 이런 걸로. 그러니까 맨날 속에 서 깔보고. 불만이고.(연구참여자3:2023.03.26)
결혼을 통해 벗어나고 싶은 원가족의 현실에서 탈출해 행복을 담보하고자 했던 큰 기대에 비해 이들의 배우자 선택은 신중하지도, 치밀하지도 못했다. 이성관계의 경험이 많지 않았고, 건강하고 친밀한 부녀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던 성장과정은 미숙하고 맹목적인 배우자 선택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원가족에서 형성된 자신과 남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배우자 선택과정에서 투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은 배우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을 방해한다. 결과적으로 연구참 여자들은 삶의 중요한 존재인 배우자 선택 과정에서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된다.
제가 근데 사실은 몇 번 안 만나고 그냥 해 가지고. (중략) 그때 상대방에 대한 것을 별로 아는 것 없이 그냥 한 거지요.(연구참여자2:2023.02.04)
남편한테 많이 오빠 투사를 했더라구요. (중략) 그런게 오빠랑 닮은 거 같애. 그 말을 듣고 내가 남 편을 선택한 거 같애. 오빠 대용으로. 내가 오빠를. 그 때 못 했던 거를 지금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거 같애요. 잘 모르지만 내 무의식은 그래서 선택하지 않았나.(연구참여자3:2023.03.26)
연구참여자들은 묵인과 회피의 결혼과정을 보여준다. 배우자의 비정상적 음주를 포함해, 기대와는 다른 배우자의 모습은 결혼 전부터 연구참여자들에게 감지된다. 하지만 이들에게 결혼은 다른 대안이 없는 유일한 도피의 방법이었다. 그러기에 스스로 느끼거나 주변에서 언급하는 배우자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외면한 채 그대로 결혼 진행 과정에 순응한다. 자신의 맹목적 선택에 대한 비정상적 충성이자, 드러나는 문제에 대한 회피였다.
저 사람이 술 먹는게 이상하다라는 걸 제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느꼈나봐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되돌릴 수가 없는거예요. 제 그거로는. 청첩장도 찍었고 좀 있으면 결혼하는 건데. 그래서 앞으로 간거죠. 앞으로 앞으로 (연구참여자2:2023.02.04)
결혼하기 전에도 술 문제가 있고 아니다 싶은 게 있었는데 내가 다 눈감았던 거 같애. 지금 지나고 따져 보면 다 문제가 보였는데 그런 거를 아예 신경 안 쓰려고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연구 참여자3:2023.02.11)
왜곡된 기준이나 결핍된 욕구의 투사를 통해 선택했던 배우자의 모습이 연구참여자들의 기대와는 다름을 것을 인지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결혼생활은 시작부터 갈등을 배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혼 전 이미 감지되었음에도 묵인하고 회피하려 했던 배우자의 모습이었다. 그러기에 배우자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을 호소하면서도 결혼생활은 시작된다. 그리고 속았다기보다는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았음을, 자기가 만든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원망을 합리화할 가장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음주였다. 연구참여자들의 배우자는 결혼 이전 눈감았던 심상치 않은 음주양상을 드러내며 연구참여자들의 기대를 근원부터 흔든다.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원가족의 삶은 현가족으로 이어지며 다시 재현된다.
내가 원하는 배우자는 성실해야 되고, 돈 개념이 확실해야 되고, 술 먹고 이상한 행동 하지 말아야 되고. 그렇게만 있었어요. 그리고 군인을 갔다와야 되고, 방위 출신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근 데 문제는 남편이 군인을 갔다 왔다고 속였어요. 그래서 이제 결혼을 했는데 어떻게 해. 그래서 보니까 그렇게 빚이 있대.(연구참여자1:2023.02.03)
우리 작은 오빠는 직접 와서 봤어요. 술 먹고 하는 걸. 소리 지르고 하는 걸 봤어요. 정신병자 수준 이고. 큰 애를 가졌을 때, 신혼 여행 때부터 그랬으니까.(연구참여자2:2023.02.04)
(2)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서 열어젖힌 세상을 향한 새로운 문
반복되는 역기능 속에 악몽은 재현된다. 연구참여자들의 결혼생활은 원가족에서의 삶과 다른 듯 닮아 있는 도돌이표의 삶이었다. 배우자의 심상치 않은 음주 양상과 그 결과로 이어지는 생계 문제, 관계에서의 갈등 등 다양한 어려움은 이들의 삶을 힘겹게 하였다. 무엇보다 기대와는 달랐던 결혼생활이 가져온 좌절감은 배우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쌓여갔다. 이 속에서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역기능을 반복하며 상황은 악화되어 간다.
이제 친정에서 이제 그런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이제 하자. 그러고 갔는데 근데 가보니까 아닌거예요.(중략) 결혼생활이 힘들었어요. 일단 남편이 술을 마시니까. 그게 힘들었어요. (연구참여자2:2022.10.03)
내가 알아서 많이 했던거 같아요. 내가 이렇게 해 주면 지가 이렇게 알아서 해 주겠지. 보면 내가 원하는 걸 남편한테 많이 해 준거 같아요. 물어보지도 않고. (중략) 근데 그걸 알아서 안 해 준다고 늘 화가 나 있어요. (연구참여자3:2023.03.26)
진퇴양난의 악몽 속에서 연구참여자들은 무력한 자신을 마주한다. 결혼이 유일한 도피처라고 생각했던 연구참여자들에게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벗어날 또 다른 탈출구를 모색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때문에 결혼이 진정한 탈출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후에도 한동안 새로운 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시간을 거친다. 하지만 이 시간은 배우자나 상황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를 마주할 기회가 되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홀로 설 수 없기에 배우자라는 뜨거운 감자를 놓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 시작된다.
그때 이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힘이 없어서..제가 그때는 직장 구하는 것도 힘들고 일단은 이 혼하려면 혼자서 살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어요. (연구참여자2:2022.10.03)
내가 힘들 때 이혼을 해 버린다든가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거를 하면 안된다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지? 처음 남편 병원 입원시키고도 남들은 막 이혼하고 이런 사람들이 너무 부러운거예요.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없으니까.(연구참여자3:2023.03.26)
하지만 연구참여자들은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바닥 끝까지 밀려난 듯 막막한 삶의 어느 순간, 다시 한번 삶을 향한 반발력으로 도약한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은 이들에게 새로 운 세상으로의 문을 열어 준다. 당면한 배우자의 알코올중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나선 상담센터나 자조모임, 회복공동체이기도 하고, 새로운 정체성과 삶을 의미를 찾아 나선 직장이기도 하다. 보다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갈구로 의탁한 종교이기도 한다. 물론 이전에 존재하지 않다가 새롭게 등장한 세상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배우자와 가정에 매몰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자 그제서야 새롭게 열린 또 다른 문이었다. 혼자라는 고립감에서 벗어나 함께함을 느끼게 해 준 곳이었다. 열린 문을 통한 세상으로의 새로운 탈출 시도는 이들을 다시 숨쉬게 하였다.
내가 어떻게 해서도 살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신앙생활로 뛰어들었어요. 그때 딱 어렵게 되버리니까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더라구요. 사람은 아무도 나를 못 해 줄 거 같아요. 하느님은 딱 나를 도와 줄 수 있고, 하느님 앞에 가면 산다 생각해서.(연구참여자3:2023.02.11)
더 이상 제 생활이 답답하고 돈도 필요하고, 그래서 내가 너무 또 원래 또 가치 없이 살았는데 더 가치 없이 보이고, 이렇게 되고 보니까 이제는 일을 할 때다 이렇게 (중략) 그게 알고 보면 갑자기가 아닌 거같아요. 왜냐하면 자세히 보면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이게 꽉 찼을 때 튀어나오는 것처럼 그게 조금씩 차 있었다고 보는게 맞지요.(연구참여자 2:2023.02.04)
연구참여자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자 한다. 여전히 음주하는 배우자와 삶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노애락과 삶의 방식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고,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 있다. 또한 자기 삶의 기쁨을 스스로 찾고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배우자가 술을 끊기를 바라거나, 자신의 기대를 배우자를 통해 실현하고자 집착하는 대신, 자기 삶의 행복과 책임을 자신이 다하고자 한다. 배우자를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나 존재 이유를 찾는 대신 새로운 삶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찾아 나간다.
집에만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것도 안 되었겠죠. 비관해서 가서 죽어야지 하면서 죽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렇게 도움을 주는 곳을 만났고,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연구참여자2:2023.02.04)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걸 이제사 찾은게 한달이나 두달에 한번씩 멀리 떠나는거예요. 멀리 떠나서 여 행하고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 먹으러 다니고(연구참여자1:2023.03.10)
사람이 이제 나이가 드는게 좋은 건 아닌데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좋아지는게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같은 경우에도 어릴 때는 진짜 거의 집에만 있었잖아요. 그러다 지금 뒤늦게 제가 세상이 더 넓어진거잖아요.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넓어져서 지금 정도면 나 이가 들어도, 더 이상은 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괜찮네. 뭐 이런 생각이 들지요. (연구참여자 2:2023.02.04)
3) 적응전략
(1) 삶을 배우는 공동체
연구참여자들은 주어진 세상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가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원가족이나 현가족과는 다른, 또 다른 의미의 가족이 되어주는 공동체를 만난다. 이는 신앙을 토대로 한 종교 공동체, 함께 회복을 도모하는 회복공동체 또는 직장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것은 아니고, 함께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이들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을 새롭게 배우고, 소속감과 존재감을 키워 나간다. 이를 통해 그동안의 고립무원의 상황을 벗어나 역기능적인 공동의존이 아닌 건강한 상호 의존의 관계를 형성하며 변화해 가고 있다.
(직장이) 이게 10년을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믿어주고 이러니까 제가 힘들 때 있고, 짜증나고 화날 때 있지만 이런 걸 다 살면서 느낄 수 있는거지 하면서 견디는데 보람 있는 일도 많다고 느껴져요.(연구참여자1:2023.02.03)
(교회에서) 처음에는 교제가 안 되었어요. 제가 사람 잘 못 사귀거든요. 그냥 제가 말을 잘 못해요. 말을 잘 안 하고 할말도 없고. 근데 요즘 제가 말이 많아진거예요.(중략) 제가 생각하기에 옛날보다는 좀 되는거 같아요. 옛날에는 형식적으로 인사하는게 다였어요. 근데 이제 조금 걱정이 되고 기도 도 할 수 있으면 (같이) 하게 되고 그렇게 되요 (연구참여자2:2022.10.03)
제가 다른 공동체에서 치유 작업 하는데도 많이 들락거리고 카페나 유튜브도 들락거렸는데 나도 그런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적극적으로 들어가 가지고 식구가 되어가지고 하는데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여기겠다 하는 생각을 한 거죠. 그때 당시에는. 그리고 여기에서 치유해야지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여기가 내 공동체구나‘하는 생각. (연구참여자3:2023.02.11)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연구참여자들은 새로운 삶을 배운다. 특히 어린 시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가 없었던 이들은 그 전까지 알지 못했던 삶의 방향과 구체적인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안내자를 만난다. 안내자는 종교인이거나 전문가이거나 때로는 평범하게 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주변의 누군가이기도 하다. 때로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나 삶의 지혜를 담은 책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이들이 안내자를 만나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새롭게 배우는 삶의 방식을 공유하고 공감 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이들은 새롭게 알게 된 것을 실천하며 이전과는 다르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저는 비폭력 대화 배울 때 가장 놀란 것이 요구예요. 요청해도 되네? 다른 거 보다 요구해도 된다고? 요청해도 된다고? 맨날 그게 꽂힌 거예요. 근데 그거 배우면서도 요청해도 된다는 거에 눈물이 나면서.(연구참여자3:2023.03.26)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라고 했어요. 근데 이것도 교육에서 배웠어요. 집에 가서 남편한테 ‘고맙다’ 말 해 보라고. 숙제가. 그래서 참 힘들었어요. 고맙다 소리 하는게. 그래도 만들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요즘에도 웬만하면 고맙다는 소리를 해요.(연구참여자1:2023.03.10)
(2) 다른 삶을 위한 다른 시선
연구참여자들은 그동안의 왜곡된 시선에서 벗어나 가족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생긴 자신과 주변에 대한 관점의 변화이다. 특히 그동안 불행의 이유로만 인식했던 부모님이나 배우자 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있었다. 원망과 분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게 되거나, 부정하던 모습을 직면하기도 하였다. 오해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게 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을 이해하며 연민의 마음이 생기 기도 하였다. 이는 자신의 시선을 왜곡시키는 과거의 상처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 보게 된 결과이거나, 그동안 삶이 버거워 좁혀졌던 시야가 확장되며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된 결과이다.
제가 그 트라우마 때문에 제가 남편을 제대로 안 본 거예요. 남편을 나쁜 놈으로만 본 거예요. 근데 이제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바뀌더라구요. (연구참여자1:2023.02.03)
너무 오랜 세월 술하고 싸워서 남편한테 좋은 점 하나도 없고 나쁜 놈 이것만 가득 차 있는데 (중략) 일하러 갔을 때 나를 챙겨주고 이런 걸 보니까 그런 게 진짜 그 마음이었구나. 나한테 하는 마음.. 이런 게 지금 분별이 좀 되는 거 같아요.(연구참여자3:2023.02.11)
처음에는 이제 왜 저럴까 그런 생각 많이 들었는데 어머니도 알고 보면 아들 하나 밖에 없는데 많이 힘드셨겠다 이런 생각 들었어요. (중략) 저는 남편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이잖아요. (연구참여자 2:2022.10.03.)
무엇보다 이들의 가장 큰 변화는 자신에 대한 시선과 태도의 변화였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을 통해 삶의 주인의식을 되찾게 된다. 자신을 일방적인 피해자로 인식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였고, 힘겹지만 자기 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자기 삶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존재나 삶의 과정이 온전히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과 함께 자신을 긍정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무력한 피해자로 인식하였던 연구참여자들은 스스로 자기 삶을 자신이 바꿔갈 수 있다는 주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내 작업 하게 되고 프로그램을 하다 보니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알아차리게 되고 그래서 술 먹는 아버지 때문에 힘들었다. 술 먹는 남편 때문에 힘들었다 참 많이 원망하고 울고 다녔는데 그걸로 인해서 나를 알게 된게 참 감사하고. (중략) 내가 틀이 너무 강하고 누가 실수하는 것도 싫어하고 그러 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그런데 이런 나라도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하겠어요.(연구참여자 1:2023.03.10)
남편하고 살 때 남편 나쁜놈 했는데 보니까 내가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불안과 왜곡된 것 때문에 남편 달달달 볶고 (중략) 진짜 내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가 돌았구나. 이런 거. 정말 나를 모르는구나.(연구참여자3: 2023.03.26)
(3) 관성을 극복하는 각고(刻苦)의 노력
연구참여자들은 변화에 저항하는 과거의 끈질김을 경험한다. 변화된 삶을 욕구하고 다르게 살기 위한 시도를 하지만 익숙한 관성은 벗어나기 쉽지 않다. 변화의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신을 구하기도 하고 과거와 다른 자신의 모습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을 경험하기도 한다. 변화에 대한 이성적 의지와 달리 몸에 밴 삶의 방식이 습관적으로 드러나 허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계속 발견하고, 옳은 방식을 질문하며 과거라는 관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해 주려고 하면 할수록 그 사람들 더 버린다고 하니까 놔두는 게 최선이라고 하니까 그냥 두고 있는데 그냥 두고 있는게 내가 저 사람을 방치하는 건지, 그걸 감을 못 잡겠어요. (연구참여자2:2023.02.24)
앞으로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그게 몸에 밴거라서. 상대 비위 맞추는 거.(연구참여자1 :2023.03.10)
때로 익숙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다르게 살고자 하는 절박함이 있기에 이들은 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이들은 부모의 삶의 모습을 반복하거나 불행한 과거의 삶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 없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기에 이들은 관성에 굴복 할 수 없다. 방법이 있음을 알기에,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기에 더욱 굳건한 꿈을 꾼다.
이렇게 사는 삶이 너무 괴로우니까. 그리고 이건 아니다. 내가 꿈꿔온 삶도 아니고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연구참여자3:2023.03.26)
아버지와 반대의 삶을 살려고 엄청 노력하고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 엄마처럼 살기 싫어요가 엄청 많아요. 엄마의 무능함이. 자식들한테 다 의존하고 산 엄마. (연구참여자1:2023.03.10)
연구참여자들에게 변화된 삶은 완결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회복이 일회성 에피소드가 아니고 계속해서 가야 하는 변화와 성장의 과정임을 알기에 다르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이를 위해 교육을 통해 새롭게 배우고, 익숙하지 않은 삶을 방식을 시도하고 체화해간다. 이는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있고, 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동료가 있기에 노력을 지속할 동력을 얻는다. 여전한 혼란과, 기대만큼 변화에 동참하지 않는 배우자의 모습에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지만 자기 삶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경험되는 긍정적 변화에 감사 하며, 이는 새로운 변화의 마중물이 되고 있다.
전에는 그런 걸 갖고 시비를 걸고 싸웠어요. 근데 지금은 그냥 웃어넘기고 인정하고..(중략) 그렇게 인정하고 살기까지 참 오래 걸린거 같애. 교육이 진짜 대단해요. (연구참여자1:2023.03.10)
그게 제가 꾸준히 교육을 받은 덕분이겠죠. 제가 혼자면 계속 미워했을거예요. 근데 이제 끊임없이 배우고 거기서 또 해야 할 것들 있잖아요. 작업이 있잖아요. 그걸 하고, 얘기를 하고. (연구참여자 2:2023.02.04)
Ⅳ. 논의 및 결론
본 연구는 Mandelbaum(1973)의 생애사 분석 방법을 통해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자이자 현재 배우자 역시 알코올중독자인 여성ACOAs의 생애사를 살펴보았다. 연구참여자들의 삶의 차원은 ‘혼자 커버린 애어른’. ‘고립무원’, ‘주인공이 아닌 삶’으로 정리되었다. 전환점은 ‘결혼이라는 맹목적인 도피의 끝, 다시 제자리’,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열어젖힌 새로운 문’, 그리고 적응전략으로 ‘삶을 배우는 공동체’, ‘다른 삶을 위한 다른 시선’, ‘관성을 극복하는 각고의 노력’으로 정리되었다.
연구참여자들은 아버지의 알코올중독과 가족의 역기능 속에 유년기를 상실한 채 조숙한 애어른이 되었다. 그 누구의 안내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자기 삶의 능동적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의존하는 주변인의 삶을 살아왔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으로 도피하지만, 맹목적 배우자 선택과 수동적 결혼 과정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연구참여자들의 비현실 적 기대를 저버리는 또 하나의 알코올중독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익숙한 어린 시절 역기능을 반 복하며 지쳐갔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연구참여자들은 밖을 향해 자신의 세상을 확장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삶의 지혜 를 알려주는 안내자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가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나고, 이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가족과 자신에 대한 시선의 변화와 함께 자기 삶에 대한 주체성을 찾아 가 게 된다. 회복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지만 이들은 과거와는 다른 삶에 대한 절박함을 갖고 변화의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알코올중독자 자녀의 성장과정과 원가족 경험이 이들의 결혼과 결혼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배우자 선택과 결혼의 과정, 그리고 결혼생활에서의 대처 과정을 통해 알코올중독자 자녀가 알코올중독자의 배우자가 되는 알코올중독 가정 세대전이의 과정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다 행복한 삶과 건강한 가정을 위한 회복의 과정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이라는 상황에 더한 딸이라는 성별은 부모의 보호와 안내의 부재 속에 존중받지 못하는 주변인의 삶을 경험하게 하였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던 결핍은 혼자 버텨내는 삶을 강요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는 모순을 키웠다. 이는 결혼 과정과 결혼생활에서의 맹목성과 무모함, 그리고 부적응적인 열심(熱心)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알코올중독자 자녀가 친밀한 관계에서 부적응적 선택을 하고, 어린 시절의 역기능적 역할 유형을 반복(김명아, 2001, 박현선, 2001, 이선화, 2004, Bantz, 2003)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또한 친밀한 관계에서의 비현실적 기대와 이러한 기대의 좌절이 상대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져 관계에 악영향을 끼 친다는 기존 주장(강향숙, 2013)과도 일치하였다. 그리고 알코올중독자 자녀가 부부간 낮은 친밀감과 갈등, 낮은 결혼생활의 질과 만족도를 경험한다는 연구결과(Domenico & Wimdle, 1993;Kearns- Bodkin & Leonard 2008;Watt, 2002 )와도 연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본 연구는 알코올중독의 세대전이를 경험하는 알코올중독자 자녀의 부정적 측면 뿐 아니라 이들의 회복탄력성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본 연구의 연구참여자들은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에 이어 배우자의 알코올중독을 경험하며 좌절하지만, 단순히 수동적인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생의 과정 동안 자신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지속한다. 비록 결혼을 통한 원가족으로부터의 도피 시도와 같이 그러한 노력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노력한다. 이는 중독가정의 자녀들이 회복탄력성을 경험하며, 자신의 행복 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연구결과(Jane, 2015)를 뒷받침한다. 본 연구의 연구참여자들은 알코올중독자인 배우자와의 분리를 시도하며 세상으로 나옴으로써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일원이자 사회인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며, 공동체 안에서의 공감과 관계, 연결 됨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달시키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긍정적 관점 등을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알코올중독자 자녀에 대한 이해와 개입에 있어 생애주기별 관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알코올중독이라는 이슈에만 초점을 두거나, 자녀의 문제행동이나 적응 등 문제에만 관심을 제한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확장된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성장하는 모든 단계에서 환 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그 단계만의 특성을 발달시킨다(박완용, 2019). 따라서 같은 알코올중독자 자녀라 할지라도 각각의 발달단계에 따라 서로 다른 발달과업을 가지고 그러한 발달과업 달성에서의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알코올중독 가정의 자녀의 성장과정에서 각 생애주기별 발달과업이 충족되지 못함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모의 중독과 가족의 역기능으로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조숙한 애어른이자 자기 삶의 능동적 주인공이 되지 못한 성장과정은 영유아기와 아동 청소년기의 중요한 발달과업인 애착형성과 사회화의 어려움, 주도성과 정체성 형성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각 단계별로 이러한 발달과업을 성취할 수 있도록 특화된 개입이 필요하다.
특히 성인 초기, 친밀한 관계 형성과 결혼이라는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코올중독자 자녀는 배우자 선택이나 결혼 관계의 적응 과정 등 원가족의 영향으로 인한 역기능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알코올중독의 세대전이 과정에서 술이나 중독에 대한 왜곡된 기준을 가진 자녀가 자신의 음주문제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갖지 못해 부모의 중독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중독을 경험 (강향숙, 2015)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원가족과 다른 삶을 막연하게 꿈꾸지만, 그러한 기대를 현실화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건강한 안내와 지원이 없기에 원가족에서의 삶의 방식을 되풀이한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알코올중독자 자녀는 배우자 선택 과정에서 상대의 음주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결혼 이후 배우자의 음주에 대한 적절한 대처에 실패하게 된다.
배우자 선택과 결혼을 통한 새로운 가족의 형성 과정은 삶의 중요한 과업으로 알코올중독자 자녀가 이를 잘 수행해 갈 수 있도록 개입할 필요가 있다. 배우자 선택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점검하고 건강한 부부관계나 가족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을 통해 자신과 가족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알코올중독자 자녀의 특성 뿐 아니라 이들의 발달단계에 따른 구체적이고 특화된 개입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이유이다.
둘째, 알코올중독 가정 내 여성의 경험을 이해하고 개입하는데 성인지적 관점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알코올중독 가정의 여성에게 주로 적용되어 온 공동의존 개념은 성별과 관련된 측면들을 고려하지 못 하고 성차별에 대한 무관심에서 이루어졌다는 비판(양연선, 2001)을 받아왔다. 본 연구결과는 낮은 자존감과 정체성 상실, 자아의 방임, 불완전한 자기개발 등으로 설명되는 공동의존 개념(김혜련, 1998) 이 알코올중독자의 ‘딸’로 태어난 경험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을 경험하며 성장한 연구참여자들은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자인 환경에서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억압해야 했던 것에 더해, 여성이라는 성별로 인해 존중받지 못하고 다른 형제(아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성장하였다. 특히 무력한 어머니를 동일시하며 성장한 딸에게 어머니는 그렇게 살기 싫었지만 어느새 닮아버린 역할모델이었다. 이러한 가족사회적 환경은 독립적인 삶이나 사회적 성공 등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심리사회적 준비가 어렵게 하여 남성에 대한 의존적 태도를 만들었다.
1960년대에 태어나고 성장한 연구참여자들의 경험과 현재의 달라진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의 경험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남아선호사상이나 남녀차별의 양상이 연구참여자들이 성장해온 시기와 달라졌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성의 정체성과 인생설계는 타인과의 관계지향성을 띠고 있고 사회적인 관계망(self in relation)으로 대표된다(박성희, 2002)는 점에서 알코올중독 가정의 여성은 가족관계 안에서 남성과는 다른 경험을 가질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알코올중독 가정에서 성장한다는 것이 알코올중독자의 딸인 여성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있는지, 알코올중독자의 여성배우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어떠한 경험인지에 대한 성인지적 관점이 필요하다.
셋째, 알코올중독자 자녀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지체계의 구축이 절실하다. 연구결과 알코올중 독자의 자녀는 고립된 채 혼자만의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이는 알코올중독자의 자녀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사회적 지지자원이 줄어든다(장수미, 2001)는 기존의 연구결과와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고립은 알코올중독자의 자녀로서 알코올중독을 경험한 알코올중독의 세대전이에서도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었다(정상연 외, 2016). 고립은 자신과 가족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였고, 부적응적인 대처로 이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고립에서 벗어나 주변의 지지체계와 연결됨으로써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과 지지를 얻어 회복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는 알코올 중독자 자녀가 건강한 삶의 방식과 규범을 습득하고 자기 삶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다양한 공동체와 지지체계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후속 연구로 알코올중독자 자녀의 생애주기별 경험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각 생애주기별 개입을 위한 추가적인 연구를 제안하고자 한다.